ㆍ신경림 시인의 충주 목계나루
신경림 시인과 함께한 ‘명사 70인과의 동행’ 충주 여행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여든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시인은 유년시절 걸었던 샛길이며, 소 장수들이 넘어갔던 고갯길, 뗏목 사공들의 노랫가락, 학창 시절 동창생들의 이야기까지 바로 며칠 전 기억인 양 술술 끄집어냈다.
지난 22일 아침 서울을 출발해 충주까지 가는 데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주말 나들이객이 몰리며 고속도로는 다소 붐볐지만, 신경림 시인은 “후딱 가면 재미가 오히려 덜하다”고 했다. 그의 기억을 빌리자면 그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적에 충주에서 버스를 타면 서울까지 6시간 넘게 걸리는 일이 허다했다. 게다가 세 번 중 한 번꼴로 버스가 고장 나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고치다가, 여의치 않으면 다시 충주에서 오는 새 버스를 기다렸다 타고 올라가는 일도 빈번했다.
“요즘은 승용차로 가버리니 예전 같은 재미가 없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막히는 도로 위에서 갑갑해하는 동행 참가자들을 위한 ‘립 서비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풀어내는 옛날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버스는 어느새 충북 충주의 목계나루에 도착해 있었다.
목계나루는 물을 타고 충주에서 서울로, 서해로 또 그 반대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남한강에서 규모가 제일 큰 나루터였다. 기찻길이 뚫리고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목계대교가 생기면서 나루터도 장터도 쇠락해갔지만, 그 뒤로도 한참동안 새우젓 장수가 돈깨나 만지던 잘나가는 항구였다고 했다. 장날 서울서 배가 들어와 새우젓이며 염장한 생선을 풀어놓으면 멀리 원주, 영월, 제천, 문경에서까지 상인들이 와서 콩이나 팥과 바꿔갔다.
이곳에서 7~8㎞ 떨어진 충주 노은면에서 나고 자란 신경림 시인은 어렸을 적 6촌이나 8촌형을 따라 삿대를 밀어 움직이는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장터를 찾았다. 사공이 짐과 사람을 부려놓고 강 건너로 떠나면 두어 시간은 지나야 돌아왔기 때문에 배를 기다리는 동안 형들을 따라 주막에 끼어앉아 술도 배웠다.
어릴 때 그는 소위 대처(大處·도회지)인 목계나루를 처음 봤을 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상점이며 사람이며 물건이 북적대는 나루터를 보고 “다시는 내 살던 작은 고향서 살지 않고 적어도 목계에는 나와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며 웃었다. 유신 시절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출국금지를 당했던 그는,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일흔 번 가까이 해외로 여행을 떠나며 대처에서 살고팠던 한을 조금은 풀어냈다.
목계나루는 어린 그에게 너무도 찬란한 신세계였지만, 1970년대 ‘목계장터’를 써내려 간 젊은 시인은 좌절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목계장터’는 가난하고 고달픈 민초의 삶을 자연에 빗대 은유적으로 표현한 그의 대표작이다. 목계나루에 그의 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새긴 ‘목계장터’ 시비가 두 개나 있을 정도다.
그는 “김지하가 반유신 운동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박정희가 김지하를 반드시 죽인다고 공언했다는 얘기가 떠돌던 시절이었다.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있는 세상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부드럽게 민요풍으로 시를 썼다”고 회상했다.
반체제 인사로 분류됐던 시인의 젊은 날은 순탄치 않았다. 글을 써도 신문에서 이름이 지워지기 일쑤였고, 강연이 잡히면 학교가 폐쇄되고, 다방에서 모임을 가질라치면 형사들이 다방 문을 걸어 잠그던 시절이었다. 취직을 하려 해도 형사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으름장을 놓아 밥벌이할 방법이 없었다. 어떤 날은 아예 형사들이 아침부터 맥주 10여병을 사들고 시인의 집으로 쳐들어와서 “밖에 못 나가니 오늘은 나랑 술이나 먹자”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는 “명절에 고향에 가려는데 형사들이 나를 감시하려고 운전사 딸린 관내 차를 동원해 오더니 뒷좌석에 나를 태우고 같이 내려가기도 했다”면서 “모르는 사람들은 승용차 뒷좌석에 타고 고향에 오는 내 모습을 보고 ‘신경림이 서울 가더니 출세했네’ 생각하기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엄혹한 시절이 지나고 그를 감시하다 친해진 형사 중 한 명은 훗날 야당 공천을 받아 시의원 출마도 했고, 경찰서에서 흠씬 그를 두들겨 팼던 한 인사는 나중에 의원 배지를 달기도 했다고 회상하며 그는 또 웃었다.
나룻배가 사라지고 장터도 문을 닫은 목계나루에는 지난해 봄부터 ‘리버마켓’이라는 장터가 새로 문을 열면서 모래톱만 덩그랗게 남았던 나루터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문을 여는 ‘리버마켓’은 목계장터를 현대식으로 재현한 지역장터로 수공예품과 직접 기르고 만든 먹거리를 판다.
이날도 마침 ‘리버마켓’이 열려 하얀 광목으로 단장한 상점들이 모래톱을 가득 메우고 분주하게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시인이 시장 안을 휘휘 걷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신경림 선생님 아니신가요.” 반쯤 해진 청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산복을 편하게 챙겨 입었는데도 사람들이 용케 알아본다. “목계장터를 널리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며 시인의 손을 잡아 흔드는 상인, 연신 인증샷을 찍는 상인들을 뒤로하고 겨우겨우 시장을 빠져나왔다.
민물새우 새뱅이로 감칠맛을 더한 잡어 매운탕으로 배를 채운 뒤, ‘70인 동행단’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고구려 석비인 ‘충주(중원) 고구려비’를 찾았다. 충주 고구려비는 고구려의 한강 이남 진출을 입증하는 결정적 유물이자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으로 1979년에야 발견됐다. 비문을 보면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로, 신라의 왕을 ‘매금’으로 부르는 등 명확한 주종관계를 보여주며 5세기 동북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고구려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충주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 통제권을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지역인 터라 삼국의 유적이 고루 발굴되는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3세기경 마한에 속했던 충주 지역은 서기 350년경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에 편입됐지만 475년에는 고구려(장수왕), 557년에는 신라(진흥왕)의 지배를 받았다.
신경림 시인은 “학창 시절 읍내서 하숙을 하다 토요일에 집으로 걸어 돌아오다보면 개울가에 글자가 새겨진 비석과 돌들이 숱하게 많았다”면서 “당시에는 뭔지 모르고 비석들에 걸터앉아 쉬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유년시절 밭에 곡괭이만 대면 사금파리가 쏟아졌고, 길 가다 금불상을 발견해 팔자를 고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금불상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보물사냥꾼과 실업자들이 몰려와 금불상을 찾는다고 동네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중앙탑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한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신경림 시인은 탑의 유래에 얽힌 설화를 한 토막 들려줬다. 먼 옛날, 스님 두 분이 지금 중앙탑이 있는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서로 ‘어디서 오셨냐’ 묻다 보니 같은 날 한 스님은 의주에서 출발하고, 또 다른 스님은 동래에서 출발해 여기서 마주친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국토의 남북 양끝에서 출발해 마주친 곳이니만큼 ‘이곳이 국토의 중앙이다’ 해서 두 스님이 합심하여 중앙탑을 세웠다는 얘기다.
실제로 중앙탑의 건립 이유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신라시대 명필 김생 선생이 서책 보관용으로 탑과 절을 지었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왕이 태어난 날 기운을 누르기 위해 풍수지리학적으로 설계한 비보사찰이 있던 자리라는 얘기도 있다.
고려시대 덕흥창이나 조선시대 가흥창 같은 충주에 설치된 조창에서 한양의 경창으로 세곡(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나를 때 지나쳤던 길목인 만큼 세곡선의 안전을 기원하는 차원에서 탑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린 시절 신경림 시인은 탑 주변이 정비되기 전, 밭 한가운데 탑이 놓인 둔덕 위에 서서 강을 바라보곤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탑 옆에 서 있으면 강을 따라 뗏목이 10대, 20대 연이어 지나가며 사공들이 노래를 불렀다”면서 “그때는 무슨 노래인지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정선아리랑이더라”고 회상했다. 이어 “정선에서 온 소는 노래도 잘한다는 얘기가 헛말이 아니다”라면서 “당시 사공들의 목청이 얼마나 좋았던지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길, 장터, 강’이라는 수필에서 탑에서 바라본 강을 회상하며 “(중략) 강가 언덕은 온통 수수밭이었는데, 강물은 새파랗고 밭 사이의 둑에는 들국화가 만발해 있었다. 나는 강이 이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이때 처음 깨달았다”고 적기도 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던 미륵대원지는 우리나라 유일의 북향 사원지다. 북쪽을 향해 절이 지어진 배경에 몇 개의 전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전설이 마의태자와 관련된 얘기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는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떠났는데, 덕주공주는 도중에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만들었고, 마의태자는 이곳에 석굴을 지어 북쪽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높이가 10.6m에 이르는 석조여래입상은 남쪽을 등지고 덕주사가 있는 북쪽 월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형상이다. 석불은 돌을 쌓아 둘러싼 석축 안에 안겨있는 형상인데, 이번 방문에서는 석축 보강공사 때문에 석불의 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어,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이번 탐방단 모두 아쉬움을 뒤로하고 걸음을 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