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한(小寒)이 지난 1월의 첫 주말 따뜻했다. 제주도에는 비소식이 있는 오후, 목계(牧溪)로 향했다.

가흥삼거리를 둘러 돌았다. 30여 미터 지나 왼편 국기게양대 옆에 키 작은 비석이 여럿 있다. 임의백(任義伯), 정태호(鄭泰好), 박회원(朴會源), 정경순(鄭景淳), 조병로(趙秉老), 이정노(李正魯), 민치상(閔致庠) 이렇게 일곱이다. 임의백은 수운판관이고, 박회원은 학생, 민치상은 순상, 그 외는 모두 충주목사이다. 임의백의 불망비는 조선시대 가흥창(可興倉)이 한강 수운의 조세집산처로 기능할 때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나마 조병로가 1869년 충주읍성을 수축했던 목사임을 알겠고, 나머지는 안내판이 없으니 그냥 보아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풀 섶에 반쯤 가려져 방치된 듯한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다.

목계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에 솔밭이 있다. 강가로 노송이 자리하고 오른쪽에는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오토캠핑장이 드넓다. 솔밭 안쪽에는 9기의 묘소와 반공투사추모비가 있다. 이선규(李善圭), 권중대(權重大), 홍선식(洪善植), 김용기(金容基), 변용출(卞龍出), 박삼수(朴三壽)의 여섯 분은 목계청년단원들로 6.25 때의 민간인 희생자들이다. 그 옆의 이등중사 김양수, 일등병 이길상, 일등병 김상렬 역시 목계 출신의 6.25 때의 군인 희생자들이다. 추모비가 있지만, 자세히 보기 전에는 잘 알 수 없는 추모공간이다. 묵념을 올리고 돌아섰다.

목계다리에서 건너다 보았다. 낙엽진 부흥산의 실루엣이 가파르다. 중간 어디쯤 있을 부흥당은 잘 보이지 않는다. 수해로 올라앉은 목계의 옛 모습을 잠시 그려본다. 백사장 그득 사람들이 모여 청룡 백룡 어영차 줄다리기에, 응원에 펄럭이는 수십 수백의 농기(農旗), 힘을 불어 넣는 농악소리가 굉장했을 그곳은 텅 비어있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라던 목계장도 폐장된 지 오래다. 부흥산 나목(裸木)과 짝을 이룬 목계는 마냥 쓸쓸해 보인다.

강을 건너 목계 초입에는 사람 세 길쯤 되는 '목계나루터'라는 마을비가 서있다. 그 옆에 보통 크기의 송덕비가 하나 있다. 이효승(李孝承). 1958년 직선제 첫 엄정면장으로 13년을 봉직한 인물. 그리고 그는 남로당 총책 김삼룡(金三龍)과 엄정초 동창으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나마 들려줬던 인물이다. 그 옆, 폐장된 목계장터에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가 역광을 받아 눈부시다.

잠깐 걸어 부흥산 끝자락 바위서렁 아래에 있는 목계별신굿 줄다리기 유래비로 향했다. 목계장과 함께 사라진 별신굿과 줄다리기, 이제 그 유래만 비문에 남아있다. 그 옆에 윤해영(尹海英)과 박해성(朴海成)의 송덕비가 나란하다. 20세기 전반기 흥성했던 목계 시절에 지역 유지로 활동한 분들이다.

이들을 뒤로 하고 시내버스 정류소로 갔다. 그 옆에 우뚝 선 비가 하나 있고, 평비가 양옆에 앉아 있다. '민주열사 김중배 추모비'다. 김중배, 익숙한 듯 낯선 이름이다. 이는 1965년 4월 한일협정 반대 집회에 참석해 경찰봉에 맞아 희생됐다. 4월 13일 집회에서 다쳤지만 곧바로 치료받지 못해 4월 15일에 절명했다.

'친구와 싸우다 다쳤고 그래서 사망했다'는 뻔 한 거짓말로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억센 누름에 밀려 가해자도 찾지 못했고, 밀어붙인 한일협정이 타결되면서 무게중심이 그쪽에 쏠렸다. 그리고 4월 23일, 미루고 미뤄진 장례식이 봄비 추적거리는 목계에서 진행됐다.

"슬프다. 피지도 못하고 떨어진 한 떨기 무궁화, 그대 흘리신 피, 그대 간직한 얼, 3천만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으리라"는 만장 하나가 봄비에 젖고 있었다. 그의 학교 동기들이 보내온 만장. 그 동기 중에 반기문(潘基文)이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 봄비에 젖은 만장의 변주곡(變奏曲)이 '하늘은 날더러, 땅은 날더러, 산은 날더러, 물은 날더러~~'라며 폐장된 목계장터의 여운으로 그를 울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