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 수운(水運)의 전통과 목계
경희대학교 김 준 기
1. 머리말
요즘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이 계획의 중심축에 있는 것은 한강과 낙동강의 연계 수로를 건설하여 내륙을 관통하는 운하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본 발표는 이러한 내륙운하의 실현 가능성과 타당성을 거론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계획을 화두로 한 것은 한강과 낙동강의 연계수로는 이미 일세기전 조선조 제일의 수송로로서 가동하였다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충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충주는 남한강과 함께 그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충주는 남한강의 시대적 효용에 따라 선사시대 문화의 발상지로, 삼국시대의 격전지로, 고려와 조선전기에는 사대부들의 거처이자 세곡의 운송지로, 조선후기에는 상업적 수운의 중심지로 역사적 변천을 해왔던 것이다.
본 발표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상업적 수운의 중심지로서의 충주이다. 물론 충주가 수운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한강변에 위치한 가흥, 목계, 반천, 금천, 북창, 탄금대 등 충주 인근 지역에 있는 나루들의 역할이 크다. 이 중 수운의 전성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던 나루는 목계이다.
본 발표에서는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던 충주의 모습을 조명하고, 수운의 사적 전개에 따른 충주 인근 나루들의 전개 양상, 그리고 남한강 최대의 상업포구로 성장했던 목계의 발전 양상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 남한강 수운의 중심으로서의 충주
충주는 남한강의 중류지역으로서 상류의 정선, 영월, 단양, 제천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아 달천과 합류되고, 원주, 여주, 양평을 거쳐 한양으로 물길을 보내는 남한강의 중심이었다. 또한 충주는 계립령과 조령을 통해 영남지역과 연결되는 육로의 중심이기도 했다. 따라서 충주는 한반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고, 교통과 교역에 있어서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러한 충주의 위상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을이 한강 상류에 있어 물길로 오가기가 편리하므로 서울의 사대부들이 예부터 여기에 살 곳을 많이 정하였다. 달천에서 남쪽으로 거슬러 가면 괴강에 이르고, 동쪽으로 거슬러 가면 청풍에 이르는데, 사대부의 정자가 많고 의관 차린 사람들이 모이며 배와 수레들도 모여든다. <중략> 경상도 좌도에서는 죽령을 거쳐 통하고, 우도에서는 조령을 거쳐 통한다. 두 고개의 길이 모두 이 고을로 모여, 물길 또는 육로로 한양과 통한다. 그러므로 이 고을이 경기도와 영남으로 오가는 요충에 해당되므로, 유사시에는 반드시 다투는 곳이 된다.
『택리지』에 의하면 왜 충주가 수운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충주의 수운에 대해서는 우선 세곡의 운송으로부터 논의가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남한강이 물길로서 이용되었던 것은 선사 시대부터일 것이나, 본격적인 수송로로 급부상되는 때는 고려 때 시작된 조운제(漕運制)부터일 것이다. 고려 초에는 세곡(稅穀)을 보관하기 위하여 전국에 12개의 조창을 설치했는데, 강에 설치하였던 조창은 두 곳으로 모두 남한강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주의 흥원창(興原倉)과 충주의 가흥창(可興倉)이 바로 그 두 곳이었다. 이 중 흥원창은 지금의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위치하였고, 가흥창은 충주시 가금면 가흥리에 위치하였다.
충주가 세곡 운송의 중심 된 것은 비단 물길 때문만은 아니었고,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이었던 영남대로[嶺南大路]가 통과하는 육로의 중심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세곡은 낙동강 -> 계립령 또는 조령, 죽령 ->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내륙의 육로와 수로를 연계하여 운송되었다. 계립령[겨릅재, 하늘재]은 경북 문경에서 충주시 미륵리를 잇는 고개로 가장 이른 시기 영남과 남한강을 연결하는 고개였다. 그 후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연결하는 조령[새재]이 뚫리지만 이 길은 달천이나 육로를 통해 충주를 통과해야 했다. 죽령은 경북 풍기에서 충북 단양을 연결하는 고개이나 역시 남한강을 통해 충주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곡의 운송은 초기 관선(官船)을 이용하였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사선(私船)으로 대체된다. 이렇듯 수운이 사선업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은 남한강의 수운 체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사선은 그간 소작료의 운송과 소규모의 물물교환 정도를 담당하였을 터이지만, 세곡 운송을 통해 얻어진 이윤을 바탕으로 선박의 규모나 척수를 극대화할 수 있었고, 그간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또 다른 이윤창출 행위를 모색하여 다양한 상품의 유통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다.
사선업자는 경상선인(京江船人)과 지토선인(地土船人)이 있었지만, 초기 세운의 주도권을 잡았던 경강선인들의 부정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17세기 이후에는 지토선인들에게로 주도권이 이양된다. 이를 계기로 그간 상대적 열세에 있었던 지방의 선주들은 경강선인과의 격차를 줄이며 지역의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토선인들의 성장은 18세기경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상품 유통의 증대와 맞물리면서 드디어 남한강 수운의 전성기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충주는 저수시(低水時)에도 돛단배가 소강할 수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상업적 수운의 성장은 남한강에서의 충주의 위상을 더욱 높게 만들었다. 20세기 초에는 충주에 250척의 선박이 운용되었는데, 이중 충주재적의 선박수는 42척이었다.
이러한 충주의 수로와 육로의 연계망은 17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더욱 확충 정비된다. 중심포구의 성장이 그 배후지를 늘려나가고 배후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을 확충해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신경준이 쓴 『도로고』를 보면, 6대로 중에 <동래로>를 들고 있는데 이 길은 서울에서 한강, 신원점, 판교, 용인, 양지, 기안점, 광안, 석원, 충주에 이르는 육로 외에도 서울에서 살곶이다리, 송파를 경유하여 광주, 경안, 쌍령점, 이천, 음죽, 장호원, 가흥창, 박달고개, 충주에 이르는 길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천, 장호원을 경유하여 충주에 이르는 길이 『임원경제지』에서는 독자적인 대로인 <서울-태백산로>로 승격하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로>의 중요 경유지들인 송파, 광주, 이천, 장호원, 충주는 남한강 수로와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18세기 말, 19세기 초 간선도로의 증가는 행정 중심지나 군사요충지를 연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상품 유통권인 지역 중심 장시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고, 충주가 그 중심축에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 충주지역 중심나루의 전개양상
조선 후기 생산력의 증대는 잉여생산물을 만들어냈고, 이 잉여생산물의 교환을 위해 장시와 나루가 다수 증설되었다. 특히 돛단배와 같은 운송체계의 발달은 나루를 원격지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시켜 남한강 유역의 몇몇 중심 나루들은 지역의 상인이나 선인(船人)들에 의해 경영되며 상업포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충주 역시 세곡운송의 중심지에서 상업적 수운의 중심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인근 지역에 중심나루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충주의 수운을 이끌던 지역의 중심나루들은 가흥, 목계, 안반, 금천, 북창, 탄금대 등이었다.
1) 가흥의 전개양상
충주의 나루 중 가장 이른 시기 발전했던 나루는 가흥이었다. 가흥은 언급했듯이 가흥창이 있었던 지역으로 세곡의 집산과 운송의 중심지였다.
가흥창 : 옛날에는 덕흥창이라 일컬었고, 또 경원창이라 일컬었다. 가흥역 동쪽 2리에 있다. 예전에는 금천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세조 때에 여기에 옮기고 경상도 여러 고을과 본주(本州) 음성, 괴산, 청안, 보은, 단양, 영춘, 제천, 진천, 황간, 영동, 청풍, 연풍, 청산 등 고을의 전세를 여기에서 거두어 배로 서울에 운수하는데, 수로로 260리이다. 예전에는 창사가 없었는데, 금상 16년에 비로소 집을 지었다. 모두 70간이다.
나라에서 여기에 창을 설치해 고개 남쪽의 경상도 일곱 고을과 고개 북쪽의 충청도 일곱 고을의 세곡을 거두고, 수운판관을 시켜 뱃길로 서울까지 실어 나른다. 주민들은 객주업을 하면서 쌀이 드나들 때 끼어들어 이문을 노리며, 가끔 횡재하는 수도 있다.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가흥은 17세기 전반까지는 세곡의 집산지로서 번영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수운을 통해 운송을 책임지는 가흥참이 있었고, 육로와의 연계를 위해 가흥역도 있었다. 하지만 가흥의 번영은 17세기 후반부터 일부 지역의 세곡이 돈으로 납부되거나 인근 나루를 통해 세곡이 운송되면서 변화를 겪게 된다.
영남 7읍의 쌀 1석을 죽령과 조령을 넘어 가흥창까지 운반하는데 쌀 2석이나 들 정도로 운임비가 비싸졌으므로 영조 25년(1749)에 영남 7읍의 전세곡(田稅穀)이 작전(作錢)되었다. 가흥창에 보관된 세곡은 절반 이하로 감소하였다.
충주, 음성, 괴산, 청안, 진천, 연풍 등 6읍의 전세를 북창에서 전수받아 참선 10척으로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세운은 이렇듯 쇠퇴하다가 급기야 고종 19년(1882)에는 폐지되게 된다. 이러한 세운의 위축과 폐지는 가흥이 가지고 있었던 중심포구로서의 기능을 약화시킨다. 더욱이 가흥은 충주의 인근 나루들처럼 상업포구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목계와 안반, 금천과 같은 인근 나루들이 이미 상업포구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며 어염과 같은 유입상품의 확보와 이를 교환할 곡물을 수집할 수 있는 배후지를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흥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 금천의 전개양상
금천은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에 있는 나루이다. 조선 초까지는 영남의 전세를 수납하는 경원창이 있어 번영하였지만, 조창이 가흥으로 옮겨 가면서 세곡의 운송 기능은 없어졌다. 조창을 가흥창으로 옮긴 이유는 금천과 가흥 사이에 막희락탄이라는 큰 여울이 있어서 배가 난파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운의 중단은 금천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뒤에 마을 북쪽으로 둘러서 흘러가므로, 동남쪽으로는 영남의 물자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의 생선과 소금을 받아들여, 여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마치 한양의 여러 강마을들과 비슷하다. 배의 고물과 이물들이 잇닿아, 하나의 커다란 도회지를 이루었다.
세곡의 운송이 중단된 후 금천은 상업포구로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다. 금천은 한양을 통해 유입된 어염을 육로를 통해 음성으로 공급하였고, 달천을 통해 괴산으로 공급하였다. 특히 조령을 통해 유입된 영남의 곡물은 달천을 통해 집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상업포구를 이끌 배후지도 충분한 편이었다. 이러한 금천의 번영은 개항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천과 인접해 있는 반천과 탄금대가 상업포구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음성과 괴산으로 어염을 공급하게 되면서 금천은 예전의 위상을 잃게 된다. 물론 개항기 이후에도 금천에 소량의 곡물의 이출과 어염의 이입이 있었지만 그 규모가 오히려 금천의 쇠퇴를 입증해줄 뿐이다.
4. 상업적 수운의 전개와 목계의 번영
1) 조선 전기와 후기 목계의 위상 변화
목계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주목의 7진도(津渡)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어 나루의 역사가 자못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에서 서북쪽으로 20리인데, 가흥으로부터 원주, 제천으로 통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조선전기 목계나루는 물길로 단절된 육로를 연결하는 진도(津渡) 이상의 기능은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읍치지역과 근접해 있고, 강 반대편에는 조선전기 남한강 최대 포구였던 가흥창이 있으며, 원주와 제천을 연결하는 육로가 있었다는 목계의 지리적 이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조선후기 남한강을 사이에 둔 한양, 광주, 이천, 장호원과 충주, 원주, 제천 등지는 대시장이 열렸던 곳이고, 목계는 이들을 연결할 수 있는 육로와 수로의 연결지로서 위상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강을 내려오는 생선배와 소금배들이 정박하며 세를 내는 곳이다.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물산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들므로, 주민들이 모두 장사에 종사하여 부유하다.
조선 전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후기의 기록인 『택리지』를 비교해보면, 그간 목계의 나루의 역할이 어느 정도 변모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세운을 중심으로 하던 남한강 수운의 비중이 사선업자에 의해 상업 활동 위주로 변화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목계는 진도의 기능뿐 아니라 장삿배가 오르내리는 상업포구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남한강 상권의 발달로 충주 지역은 세곡운송 중심의 가흥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상업포구가 필요했고, 그 역할을 목계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은 동해의 생선과 영남 산골의 화물이 이곳에 집결되어 판매되었다는 것이다. 동해의 어염은 원주에서 집산되므로 육로와 수로를 통해 목계에 공급되었을 것이고, 영남 산골의 화물은 단양과 제천을 거쳐 육로로 운송되거나 남한강 상류의 물길을 통해 공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계의 상업적 발전이 지리적 이점과 시대적 필요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목계 사람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효종 때 청백리로 유명한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은 1640년(인조18)에 목계의 강상(江商)이 겪는 애환을 「고객행(賈客行)」이란 시에 담은 적이 있다.
木溪江上凡幾家목계 강가 서너 집이
家家買販爲生涯집집마다 장사일로 생계를 꾸린다
不事鋤犁事舟楫호미 쟁기 버려두고 노젓기 일삼아
年年逐利隨風波해마다 이문 좇아 물결 따라 다니지
東鄰西舍同時發이웃 사는 사람들 함께 떠나니
共言今日日最吉오늘이 가장 길하다고들 하네
船頭釃酒賽江神뱃머리서 술 걸러 강신께 고사하여
所願身安財滿室건강하고 재물 많기 빌고 또 빈다
有雨可以庇蓬屋비 오면 장막 친 선실에서 피하고
有風可以張帆幅바람 불면 한껏 돛을 펼친다
只愁江淺灘甚樂다만 근심은 강 얕고 여울 사나워
沙石磊磊多礙觸자갈이 울퉁불퉁 장애가 많다는 점
有時膠底不肯進강바닥에 닿아 나아가지 않으면
齊聲合力極推挽어영차 힘을 합쳐 밀고 당긴다
徐行安穩尙云可천천히 가서 안전한 게 낫지
疾走轉危最可悶질주하다 뒤집히면 아주 큰일나
歷險方知平地樂“험한 데를 지나봐야 평지 좋은 줄 알지”
驚憂定來還笑謔소동 가라앉아 되려 우스갯말
下船取樵上船炊땔나무 주워다가 배에서 밥을 짓고
日暮繫纜波上宿저물녘엔 닻줄 묶고 물결 위서 잠잔다
西來舟中多舊侶서쪽에서 오는 배는 구면이 많아
往往停橈相與語왕왕 노질 멈추고서 말을 건넨다
峽中鹽直比來高“이즈음 충주협에 소금값이 올랐어”
京口米價今幾許“서울 쌀값은 얼마나 하나요?”
前年大水怕氾濫지난 해 홍수에는 범람하여 두렵더니
今年大旱困灘渚올 해 가뭄엔 배 띄우기도 곤란하군
咄哉陰陽何錯迕쯧쯧 음양이 어찌 이리도 어그러질까
作賈利輕多辛苦장사해도 이문 적고 고생만 많구만
賈客賈客休歎息상인들이여 상인들이여 탄식을 마오
君子方憂天下溺군자께선 천하 혼란을 근심하고 계신다오
길일을 잡아 배를 띄우면서 강신(江神)에게 고사를 지내고, 거센 여울에서 목숨을 담보로 파도와 싸우고, 그것도 모자라 수량(水量)이 적어 배가 강바닥에 닿으면 배에서 내려 어영차 배를 끌기도 한다. 또한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배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가물면 가문 대로 홍수가 들면 홍수가 든 대로 배 띄우기를 걱정한다. 이렇게 죽어라고 장삿일을 하지만 초기의 이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강을 오르내리며 익힌 얼굴들과 주고받는 말들에게서 잠시라도 위안을 찾는다. 충주의 소금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서울 쌀값은 어느 정도인지. 좋은 정보를 얻어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는 게 장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인용시에는 장삿배를 부리던 목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노력이 축적되며 목계는 점점 상업포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2) 상업포구로서의 목계의 번영
남한강의 수운이 상업적 목적으로 전환된 후 목계는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나오는 곡물과 담배, 서울에서 공급되는 소금, 새우젓, 기타 생활필수품을 교역하던 상업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한강 상류의 연안에서는 아직도 물물교환의 관습이 남아 있다. 자가의 농산물을 사용하여 드물게 석유, 해산물과 교환하는 것이 있어도 식염과 교환하는 것이 관습이다. 예년 해빙기에 이르면 마포, 용산지방의 객주는 배를 고용하여 식염을 만재하고, 상류 주요 선부장(船附場)에 이르러 고객을 기다린다. 현지의 농민은 우마 또는 지게로 농산물을 가져와 소금과 물물교환을 한다. 배는 종종 한 곳에 오랫동안 체류하는데, 소금을 모두 판매하고 돌아올 때까지 3개월이 소요한다. 그런고로 주행기간에 있어서 불과 3회 거래를 하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선부(船夫)는 교역을 끝내면 농산물을 적재하고 귀환한다. 객주에게 운임 수수료로서 대개 현품을 지불 받는다.
인용문은 1910년대 남한강 수운의 상황을 기술한 것이다. 이러한 물물교환의 형태는 18세기 이후 남한강에 있는 대부분의 나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가 되면 나루의 지배권이 시전상인으로부터 객주[여각]에게로 옮겨가고 있었고, 지방의 포구들은 이들을 중심으로 교역의 규모를 넓혀 나가고 있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상품유통의 성격이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이며 임시적이었던 것이 대규모적이고 집산적이며 규칙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에 따라 상품의 수집을 전문으로 하는 객주의 출현이 필요했고, 경강지역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그간 국역을 담당하던 나루의 중심 세력가들이 직업적인 객주로 전신해갔던 것이다. 지방의 객주들은 지역의 시장정보에 밝고, 상품의 집산에 유리하였다. 이들은 상품의 중개와 판매뿐 아니라 화물의 보관, 여숙업, 금융업을 겸하기도 하였다. 목계는 이러한 지방의 객주들이 활동했던 남한강변의 대표적인 중심포구였는데, 미곡, 참깨, 어물, 소금, 청과물, 우마, 석유, 담배객주들이 있었다.
1906년 목계에는 객주 15호가 있어 구전을 받고 화물을 위탁매매하였다.
목계는 충주 전역을 비롯하여 제천, 원주, 음성, 괴산, 그리고 경상도 북부지방의 상인까지 모여들었던 상업포구였다. 목계에는 7대 여각이 유명하였는데, 그 중 김유관 여각은 안채 5간, 객실 17간, 마방(馬房) 10간, 창고 40간에 달하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고, 목계의 창고 중에는 10,000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도 있었다 한다.
객주를 통해 거래되던 물품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물론 어염이었다. 소금과 어물은 남한강 수운의 성쇠를 좌우할 만한 물품이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남한강 유역에서 거래되는 서해안과 동해안산 소금에 대하여 염세를 부과하였는데, 목계는 염선으로부터 염세를 징수한 곳이기도 했다. 또한 목계의 소금 공급권은 인근 지역뿐 아니라 괴산, 제천, 강원도 일부 지역까지 포함할 정도로 유통범위가 넓었다.
목계와 같은 큰 포구에서는 장이 난전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교역장인 도가(都家)를 두어 어염(魚鹽)을 거래하게 하고, 곡물과 소금의 부정거래를 막기 위하여 ‘말’ 감고를 두었다고 한다.
어염과는 반대로 목계에서 집산되어 한양으로 운송되는 대표적인 물품은 곡물과 담배였다.
각도의 환곡이 단기 4196년에 탕진된 이후에 단기 4199(병인 1866)년부터 조정에서는 비환미(備還米)를 각읍에 분송하여 별도로 사창을 설비하고 각면에다 사수 일 인씩을 두고 책임을 맡기게 하였는데, 본주에는 각면에다 토교(土窖) 15처를 신설하였다.
15처의 신설 토교 중 목계(엄정면 산계동)의 토교(土窖)가 12간으로 가장 큰 규모였고 엄정, 산척, 소태면의 환곡을 책임지게 되었다. 물론 이는 국가에서 운용한 환곡에 대한 기록이지만 사창(社倉)의 전통은 상업적으로 변모하며 목계가 인근 지역의 곡물을 집산하여 경성으로 운송하는 지역적 거점이 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목계는 충주읍치에서 30리 떨어져 있는 선부장으로서 대소원 및 내창의 곡물이 이곳에 집산되어 수로로 경성으로 가거나 일부분이 인마로 강원도에 분배된다.
그런데 목계의 경우 주변 지역으로부터 집산된 곡물과 담배를 한양으로 수송하였으므로 객주[여각]를 중심으로 하여 전문적이고 대규모적으로 운송업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장삿배를 고용하여 물품의 운송을 담당하게 하고 물품의 인수자에게 운임을 제외한 중개료를 수수하였다.
3) 목계 시장의 전개 양상
남한강변에 있는 나루에서는 장삿배가 오갈 때마다 부정기시장이 섰다. ‘갯벌장’이라고도 불렸던 이 장은 오일장으로 대표되는 정기시장과 달리 배가 들어올 때만 며칠씩 계속 열리고, 겨울철 뱃길이 막히면 몇 달씩 장이 서지 않았다. 나루마을이었던 목계도 처음에는 이러한 형태의 장이 섰던 것이다.
강변에 위치한 갯벌장터는 여타 시장과 달리 닷새만큼 열리는 게 아니었다. 뱃길이 순탄하면 한 달에 대여섯 번도 열렸으나 풍랑이 사나우면 달포가 넘도록 비린 자반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장날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소금배가 닿았다는 소식이 흰죽배미나 숯방이 골짜기로 전해지면 동짓달 긴긴밤에 손마디가 아리도록 짜놓은 무명 자투리나 수달피 가죽을 챙겨들고 갯벌장터로 줄달음쳤던 것이다.
인용문에서 기억하는 목계의 장은 분명 갯벌장의 모습이다. 물론 목계에서도 정기시장이 섰었다. 지역상권이 확대되고 교역량이 많아 사람들이 들끓게 되자 목계에도 정기 시장을 연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목계에 오일장이 선 것은 1908년경부터 1938년경까지였고 장날은 2일과 7일이었다. 1908년 목계의 초기 정기시장은 충주읍내를 넘어서는 교역규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1910년대 이후에 장의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가 병자년 장마 이후에 급기야 소멸되고 마는 것이다.
정기시명 | 1908(원/매시) | 1910(원/1년) | 1938(원/1년) | 1975(천원/매시) |
충주 | 500 | 34200 | 1914038 | 10180 |
신당 | 40 | 1800 | ||
내창 | 400 | 30240 | 175720 | 6500 |
대소원 | 400 | 30600 | 52400 | |
용원 | 80 | 3960 | 28000 | 1900 |
목계 | 600 | 10200 | 39950 |
<목계 주변 정기시 규모의 변천>
목계에 정기시장이 위축되었다고 해서 이 당시 목계의 포구기능이 없어지거나 쇠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도표 상으로 확인되는 목계시장의 전성기인 1908년과 쇠퇴기인 1910년 사이 불과 2년 동안에는 시대적 변화를 이끌 아무런 사건도 없는 것이다.
이는 목계가 원래 100여척의 배가 드나들던 상업포구이므로 정기시장보다는 배가 들어올 때마다 열리는 부정기시장에 적합했던 곳이라는 데서 그 첫 번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시장의 역사적 전개 양상에서 찾을 수 있듯이 목계의 시장이 정기시장에서 상설시장의 형태로 발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목계는 원래 객주들이 활동한 거상(巨商)들의 본거지였다. 거상들은 소비자와의 직접 거래하기보다는 배후지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도매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매업을 위해 목계에는 이미 아랫말과 건너말을 중심으로 상설점포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목계는 주변의 내창장이나 용원장 때문에 정기시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고, 이미 고정적으로 지역 상권을 운용할 수 있는 전문적 상업 도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 수운의 쇠퇴와 목계의 선택
남한강의 수운은 1930년대를 지나 철도와 도로망이 개설된 후 극도로 위축된다. 이 시기 수운을 기반으로 성장해가던 많은 포구마을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목계의 경우는 바로 위축되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적어도 해방이후 6.25동란을 전후한 시기까지 목계는 나름대로의 새로운 변신을 하며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고 있었다.
우선 목계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수운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팔당댐으로 수로가 막히는 1960년대까지 돛단배가 오르내렸고, 뗏목은 수시로 내려갔다. 목계에서는 됫섬과 여우섬 주위에 돌을 깨고 돛단배와 뗏목이 내려갈 때마다 골삯을 받아 마을기금으로 축적했다.
또한 1970년대 초 목계교가 건설되기까지 목계나루의 도선 기능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목계의 나루터에는 트럭이나 버스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찻배가 있었으며, 인도선도 다른 나루보다 규모가 큰 50-60명을 태울 수 있는 배와 20-30명을 태울 수 있는 배가 있었다. 이 도선배들의 규모는 당시 목계나루의 통행량을 짐작하게 해준다. 나룻배는 마을에서 관리했으므로 이 또한 마을의 기금을 마련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공정한 나룻배의 운용을 위해 사공도 2년마다 마을에서 입찰을 통해서 선정하였고, 해마다 뱃고사를 마을 주민이 올리기도 하였다.
목계는 이 나루를 통해 단양, 제천, 원주에서 장호원, 이천, 서울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수 있었다. 이 길은 당시 지역 경제를 책임졌던 인근 장시(場市)와 맞물려 더욱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제천장과 내창장의 소들이 장호원장과 이천장을 거쳐 서울의 마장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목계나루를 건너야 했고, 이를 위해 목계에는 마방이 있었다.
이 길에 현재의 19번 도로가 건설되면서 버스와 같은 육로 수송에도 기여를 하게 된다. 이 시기 목계에 차부가 있었고, 운수업에 종사했던 사람들 또한 많았음은 교통의 요지로서 목계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라 보아진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목계에 엄정, 소태, 가금, 산척, 백운, 부론, 귀래 등 7개 면의 엽연초를 수집하기 위한 담배 수납장이 설립된 것이다. 일제는 1940년 이래 담배, 소금, 홍삼 등을 국가의 전매품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충주 인근 지역을 엽연초 주산지로 육성하여 생산량을 증대하였다. 이에 목계는 매년 수납 시기인 9월부터 5-6개월간에 인근 지역의 담배를 수납함으로써 막대한 자금을 이 지역에서 유통시킬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 목계에는 지역의 행정적 편의와 경제적 뒷받침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세력가들이 있었다. 충북에서 가장 큰 도정공장이었다는 영단방앗간을 경영하였던 윤해영과 천석꾼이면서 백화점을 운영했던 변희수는 그 대표적 인물들인데, 지역 발전을 위한 그들의 활동은 지금도 마을 어른들의 제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계는 마을 단체들의 자치활동도 활발한 지역이었다. 대한청년회와 의용소방대의 활동이 그 예인데, 의용소방대는 지금까지 그 전통을 유지하며 존속하고 있다.
수운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목계가 이룩한 이러한 성과들은 지역사회의 활력을 지속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농협[금융조합]과 우체국, 경찰서의 출장소, 의용소방대, 연초조합, 학생수 413명의 초등학교, 백화점, 차부, 정미소, 그리고 온갖 상점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도회지. 그것은 지역의 중심도시로 변모해가는 목계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목계는 해방 이후 6.25동란 직후까지도 수운의 전성기에 못지않은 지역적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진다.
4. 마무리
지금까지 남한강 수운의 전통과 이를 바탕으로 번영했던 충주의 나루들, 특히 남한강 최대의 상업포구였던 목계의 모습을 조명해 보았다. 1960년대 팔당댐 건설로 한강의 물길이 끊긴 후 남한강은 수운의 기능을 상실했고 남한강 유역의 나루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했다. 목계도 6.25동란 직후까지는 나름의 모색을 통해 지역 중심의 상업도시로서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었으나, 목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인력과 자본이 사라지고 공공기관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의 자리는 분명 목계의 과거를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고 목계의 미래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목계는 아직도 남한강을 대표하는 강변마을이며, 그만한 전통과 역사가 깃들어 있는 지역이다. 문화는 단 시일 내에 급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뒷받침 속에서 서서히 빚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목계’라는 지명을 처음 접한 것은 신경림의 ‘목계장터’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목계의 답사를 통해서는 청룡과 황룡이 흩어져 나루가 되었다는 전설을 들을 수 없었고, 사흘과 나흘에 장이 열린 적도 없었다. 그러나 처음 느꼈던 이러한 실망감은 목계를 실제로 접하게 되면서, 마을 어르신을 통해 목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목계야말로 진정한 남한강의 장터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장터는 단순히 물품만이 교역되던 장소는 아니었다. 장터는 사람들이 만나는 사교의 장이었고, 각종 소식이 교환되는 정보의 장이었고, 연희와 놀이가 제공되는 유희의 장이었다. 목계는 바로 이러한 교역, 사교, 정보, 유희의 기능을 모두 지니고 있었던 활기에 찬 도시였다.
아무쪼록 목계가 조선 후기 남한강변의 대표적 상업도시로 발전하며 중부지역의 경제에 활력을 주었듯이 이번에는 남한강 수운의 문화와 전통을 널리 알리는 문화관광의 도시로 거듭나 지역 문화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