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별신제의 문화재 지정방안과 문제점

이 창 식 (세명대교수)

. 머리말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는 종목과 그 의미에는 대체로 원형 보존 차원과 전승 관리 차원이 동시에 작용하는 보수적 가치성이 있다. 지정제도는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과 계승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무형문화재의 전통성을 창조적으로 지원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전승기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지정에 대한 제도적 대응책 못지 않게 문화재의 복원과 ‘예비인정제’ 등을 통한 지속적인 재현 방안도 검토할 시기가 되었다. 무형문화재의 지정 목적은 원형을 보존하고 계승시키기 위한 데 있다.

목계별신제는 현재 동제의 원형일 수 있으나 남한강 목계 장시 기능이 쇠퇴하자 사라졌다. 부분적으로 전승재현과 지역축제의 행사용으로 재구된 바 있다. 근대화 재건 열풍과 수로 기능의 변질로 인해 민속연행물로 전락한 것이다. 필자는 충주문화원의 도움으로 현지조사 작업을 통해 목계별신제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무형문화재 복원 관점에서 문헌조사와 현지조사를 통해 본래적 맥락과 원형을 찾아냈다. 전승기반의 붕괴로 정확한 실상과 재구에 여러 측면에서 힘들었다.

목계별신제의 무형문화재 지정 요건에 대하여 목계마을의 전승기반을 구축하고 마을 사람들의 의지에 달렸다 보고 있다. 목계별신제보존회가 조직되어 그 기본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전통적 맥락을 고려한 보존회 구성에는 한계가 있다.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목계별신제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짚어보고, 충북 기준 지정무형문화재처럼 문화재 지정을 전제로 다각적인 방안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더구나 목계문화역사마을 만들기 사업(문화관광부 주관)과 연계하여 목계의 상징적 무형유산으로 평가되기를 기대한다. 중원문화권의 원형자원으로 이미지화되기를 바란다. 기왕의 문화재 지정에 대한 문제점도 제시한다. 탈맥락화한 별신제를 현재 동제 형태로 전승하는 것과 연결하여 되돌려놓자는 것을 무조건 강조하는 입장이 아니다.


. 목계별신제 쇠퇴와 재현의 문제점

목계지역의 장시는 근대화 과정의 추이에 비례하여 쇠퇴하였다. 1925~1930년 사이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그리고 충주~조치원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는 점차 가라앉았고, 1973년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되면서 나룻배도 사라졌다. 더욱이 1936년에 지역을 통째로 휩쓸고 간 대홍수에 의해 장시의 건물 약 200여 채가 파손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으로 인해 상설 도매시장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장시까지도 사라졌다. 장시의 쇠퇴는 목계별신제의 전승기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한강 유역 마을이 그러했듯이 가흥창이나 장터는 이미 밭으로 변했다. 일제시대까지 450여 가구가 밀집되었고, 또 난장이 수시로 섰던 큰 마을은 이제 벽지 마을로 전락하였다. 한 해 뱃길의 무사와 상권의 활성화를 기원하던 뱃고사나 별신제도 사라졌고, 이 과정에서 행했던 대규모의 기줄다리기나 남사당놀음도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 지서, 우편국, 금융조합, 연초조합, 농촌지도소 등 관공서까지 이관 내지 폐쇄되었다. 오늘날은 고노(告老)의 기억을 제외하면, 어디서도 번성했던 목계지역의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삼거리에 세워놓은 목계 줄다리기 별신제 유래비와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를 통해서 이전의 번성함을 짐작할 뿐이다.

목계별신제는 지역의 상권 활성과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적 제의라고 할 수 있다. 보통 3~4년을 주기로 4월 초파일을 전후한 2~3일 동안 영신굿 - 오신굿 - 송신굿의 순으로 굿판을 벌였다. 지역의 동회장을 중심으로, 충주지역은 물론 전국 팔도의 무당들이 제의를 주관하였다. 무엇보다 팔도의 명무(名巫)들이 그들의 기예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축원을 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지역의 원주민들은 물론 이 곳을 수시로 드나들던 상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인근지역의 외지인들까지 한데 어울려 흥청댈 수 있던 장소와 시간을 목계별신제가 제공했다.

충주지역의 모든 무당들이 별신제를 주관했다는 제보를 통해, 별신제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근대이행기와 일제강점기, 경제개발기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원형의 별신제가 단절되었다. 1925~1930년 사이에 중부의 내륙지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되면서 남한강의 수로 기능이 점차 약화되었다. 그리고 충주~조치원간 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장시는 점차 시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별신제의 명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륵문화제(于勒文化祭)의 부대행사중 하나로 ‘한국국악협회 충주지부’의 주관에 의해 목계별신제가 시연되고 있다가 충주문화원과 목계별신제보존회에서 목계별신제를 충주지역 전통축제의 일한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목계별신제의 고증의 골격을 살려서 고증과 가깝게 흡사하게 축소하여 흥미를 가미하여 재연하는 것임으로 고증과 조금은 차이가 있음을 양지하시 바랍니다.”며 원형의 목계별신제와 시연으로서의 목계별신제가 다른 양상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영신굿(迎神-)은 부흥당(富興堂)에 좌정하고 있는 마을의 수호신을 강변에 가설한 별신제의 제장으로 영접하는 의식이다. 오신굿(娛神-)은 부흥당의 수호신을 모셔놓고, 마을의 안녕을 무()의 축원으로써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오신굿의 제의 양상을 재구할 만한 자료가 별반 없다. 당시 제의를 주도했던 무()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며, 제의의 특성상 진행 양상을 구체적으로 제보할 수 있는 제보자도 없다. 오늘날에 우륵문화제의 일환으로 거행하고 있는 목계별굿의 진행 양상을 토대로, 그리고 진행을 연출한 충청북도 농악 무형문화재 이수자 겸 충주국악협회 지부장인 전봉근(, 1941년생, 충주시 교현1 229 - 13번지)의 제보를 토대로 오신굿 곧 별신굿의 주요 대목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최측의 전봉근 증언담에서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연출에 의한 시연(試演)이기 때문에 원형의 제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송신굿(送神-)은 강변에 가설한 별신제의 제장에서 원래 좌정하고 있던 부흥당(富興堂)으로 수호신을 영접하는 의식을 말한다. 일체의 의식을 영신굿과 동일하게 진행하였다.


. 목계별신제의 전승기반과 목계별신제보존회

1. 목계의 민속문화와 별신제의 담당층

2004 7 20일 충주문화원에서 목계문화보존회-차후에는 목계별신제보존회로 바꾸어 정체성과 현재성을 확보해야 할 것-를 창립하였다. 첫 회장에 변태길이었고 현재는 김경열이다. 목계문화보존회는 목계마을문화 중 목계별신제에 대하여 지역문화자원으로 보존과 전승을 위해 그 설립목적을 두었다. 매우 조직적인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목계별신제 복원행사와 재현을 충주문화원에서 충주시 지역전통문화축제의 일환으로 거행하였다.

지역문화는 역사성과 지향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지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역문화의 전승을 통해 현장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나아가 미래사까지 전망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지역이 해체되어 가는 오늘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립하는 한 방편으로 지역문화가 바로 설 수 있다. 이러한 전제에 기초해 볼 때,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계지역의 정체성 내지 민속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목계별신제’를 지역사의 전망을 위한 중심 화두로 삼을 만하다.

목계지역은 충북선 철도가 가설된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지역이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성황을 누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가흥창(嘉興倉)의 설치와 존속에 있다. 단양에서부터 영동에 이르는 충북 전역은 물론 경상도의 일부지역에서 전세를 거두어 서울까지 운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장시가 5일장의 정기성을 띠게 되면서, 목계지역의 장시는 관 주도에 의한 상업활동에 기반을 두고 민간에 의한 상업활동이 덧보태지면서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목계지역 장시의 확대는 새로운 장시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목계지역의 장시는 교역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 소식과 정보 교환 또는 사교나 오락 등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상인이든 지역민이든 이 곳에 모여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면서 엉킨 감정을 풀었고, 함께 어울려 잔치를 벌이거나 공동의 놀이를 통해 결속을 다지면서 잠시나마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났다. 주색잡기와 음주가무가 부합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투전, 골패 등의 도박은 물론 상업적 성격이 강한 유흥의 공간이 속속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연희에 상업적인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한 부상이나 객주들의 후원이 이루어짐으로써 장시의 활성은 물론 유흥문화의 발달을 가져왔다.

장시의 한 쪽에서는 씨름, 줄다리기, 윷놀이, 보부상놀이 등이 펼쳐졌다. 또한 기녀들의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봉건사회의 분화에 따라 토지를 잃고 유랑하며 걸식하는 이들이 집단을 이루어 광대짓을 하는 사당패(寺黨牌)나 걸립패(乞粒牌)도 목계지역 장시의 유흥을 돋우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자급자족적인 소농경영체제를 기반으로 했던 봉건사회에 있어 목계지역 장시의 새로운 변화는 당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바꾸어놓았다. 특히 유흥문화의 발달은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민중의식의 성장을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새롭고 다양한 민속문화를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목계지역은 이렇게 중원문화의 발상지로서, 남한강문화의 중심지로서 전면에 부상했다. 그리고 문화의 발상지며 중심지에 부합하는 대단위 규모의 행사, 곧 ‘목계별신제(牧溪別神祭)’ 를 정기적으로 치렀다. 목계지역의 민속문화를 목계별신제가 주도했으며, 목계의 원주민들은 물론 이 곳을 수시로 드나들던 상인들, 그리고 인근지역의 외지인들까지 장행위와 관련 민속이 교류하는 장소였다. 지역의 수호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상권의 활성화를 기원하였고, 난장의 한복판에 남사당패를 불러놓고 대규모의 줄다리기를 행했다. 특정한 지역과 시간에 국한해서 이처럼 다양한 민속문화가 전승되었다는 사실에서, 목계지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만하다. 이 점이 오늘날 목계별신제를 다시 주목하는 까닭이다.

2. 목계별신제 전승양상

앞서 언급한 대로 목계별신제는 지역의 상권 활성과 지역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무속적 공동체 제의라고 할 수 있다. 부정기적인 주기로 4월 초파일을 전후한 2~3일 동안 영신굿 - 오신굿 - 송신굿의 순으로 굿판을 벌였다. 충주지역을 중심으로 강신무들이 제의를 주관하였다. 무엇보다 무속인들의 기예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축원과 굿놀이를 했기 때문에, 각지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이 곳을 수시로 드나들던 상인집단, 그리고 인근지역의 장꾼들까지 함께 참여하는 장시 마을굿인 셈이다.

동해안 별신제처럼 모든 무당들이 별신제를 주관했다는 점에서 별신제의 규모가 내륙지역에서는 가장 컸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근대화가 진척되면서 원형의 별신제가 단절되었다. 1925~1930년 도로개통과 수로기능 쇠퇴가 그 원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별신제의 명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륵문화제(于勒文化祭)의 축제항목 일부로서 ‘한국국악협회 충주지부’의 주관에 의해 목계별신제 또는 목계별신굿이라는 이름으로 시연되어 왔다.

(1) 영신굿

영신굿(迎神-)은 굿판의 주신(主神)인 서낭신을 모시는 과정이다. 부흥당 수호신을 강변에 임시로 만든 별신제의 굿판으로 영접하는 의식이다. 보통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제장(祭場)

제장은 목계인도교 옆 봉제산(봉산, 부엉산, 부흥산 등)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의 양식의 부흥당(富興堂)이었다. 부흥당은 원래는 봉제산 아랫녘, 삼거리(서울 방향 쪽) 길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68년 충주~원주간 국도 확장공사와 가설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② 제일(祭日)

목계별신제의 시발격인 의식이기 때문에, 제일을 따로 선정할 필요 없이 으레 사월 초파일 오전을 제일로 삼았다.

③ 제관(祭官)

별신(別神)이 든 해, 즉 별신제를 거행하는 당해년에 목계의 대동계(大同契)에서 제관 겸 초헌관 1, 축관 1, 아헌관 1, 종헌관 1명을 선출하였다. 고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제관 겸 초헌관은 동회장이, 축관은 고 김춘식(金春植), 아헌관은 이장이, 종헌관은 마을의 덕망 있는 원로가 도맡았다.

④ 제물(祭物)

마을의 기금으로 이장과 소임이 제물 - 쇠머리, 삼색실과, 팥떡, 백설기, 수수팥떡, 통포, 제주(祭酒:약주) - 을 마련하였다. 특히 약주는 이장과 부서기가 제의 3일 전에 부흥당에 올라 그 곳에서 직접 빚었다.

⑤ 행례(行禮)

영신굿의 행례는 유교식 절차를 따랐지만, 집도는 무(: 고 권무당)가 담당하였다. 무의 지시에 의해 시종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분향 - 헌작[초헌아헌종헌] - 독축 - 소지 등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무()가 수수팥떡을 제장 주위에 뿌리는 것으로써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였다.

(2) 오신굿[별신굿]

오신굿(娛神-)은 부흥당의 수호신을 모셔놓고, 마을의 안녕을 무당의 축원으로써 기원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오신굿의 제의 양상을 재구할 만한 자료가 없어 구술자료와 다른 지역의 별신제 무속의례를 참조해야 한다. 당시 제의를 주도했던 무당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며, 제의의 특성상 진행 양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만한 제보자도 없다. 오늘날에 우륵문화제의 일환으로 거행하고 있는 목계별신굿의 과정을 역으로 재구할 필요가 있다. 축제에서 공연한 목계별신제의 진행을 연출한 충청북도 농악 무형문화재 이수자 전봉근의 증언을 통해 오신굿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 전봉근 등 관련 연희자들의 기량도 무시할 수 없다. 연출에 의한 시연(試演)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렇지만 중부내륙권의 특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① 서낭거리

목계의 수호신인 부흥산의 서낭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이 곳을 오가는 장사꾼들의 액을 물리치는 데 주안을 두어 축원을 한다.

② 산신거리

산신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자손의 점지와 자손의 출세, 한 가정의 복락 등을 기원하는 데 주안을 두고 축원을 한다.

③ 팔선무

서낭이나 용왕 등 목계를 수호하고 있는 여덟 신격을 오신의 대상으로 삶는 굿거리다. 팔선녀를 상징하는 무녀의 단아한 춤을 통해 지역의 안녕을 기원한다.

④ 불사거리

세존불사(世尊佛師), 삼신(三神), 제석신(帝釋神), 칠성(七星) 등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세존불사에게는 현실의 고난이 해결되기를, 삼신과 제석신에게는 자손의 번영과 재수를, 칠성에게는 병액의 구축(驅逐)에 따를 수명장수를 각기 기원한다.

⑤ 대감굿

열 두 대감신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자손의 출세를 비롯하여 복락을 기원하는 데 주안을 두고 축원을 한다.

⑥ 작두굿(장군놀이)

작두에 오름으로써 잡귀나 잡신을 구축(驅逐)하는 굿거리다. 실제로 원형의 목계별신제에서 남장군과 여장군이 작두를 탔다고 전한다.

3) 송신굿

송신굿(送信-)은 놀았던 신을 잘 보내는 행위다. 강변에 가설한 별신제의 제장에서 원래 좌정하고 있던 부흥당(富興堂)으로 수호신을 영접하는 의식을 말한다. 일체의 의식을 영신굿과 동일하게 진행하였다.

. 목계별신제의 문화재적 가치

남한강 유역의 곳곳에는 별신제가 거행된 흔적이 나타난다. 특히 큰나무가 있는 마을에는 장시(場市) 또는 봉화재, 옛길 길목 등과 관련하여 별신제가 전승되었다. 일찍부터 내륙지역의 대표적인 별신제는 충주 목계별신제로 알려져 있다. 남한강 수로교역이 만들어낸 마을신앙의 독특한 형태다. 목계별신제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형성 과정만 몇 가지 측면에서 논의된 것을 알 수 있다. 목계별신제를 중심으로 남한강 별신제의 분포권을 염두에 두고 과거 모습과 특성 중에 굿의 의례성과 난장성을 주목하여 특질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첫째, 신격(神格)의 정체성 문제다. 목계 서낭당에는 현판에 ‘부흥당(富興堂)’이라 쓰여 있다. 위치는 목계 인도교 옆 봉제산(봉산, 부엉산, 富興山) 위에 있다. 원래의 위치는 산 밑 다리 앞 삼거리(서울 방향 쪽) 길 옆에 있었는데, 1968년 다리 가설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부흥당 오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으로 되어 있고 이 곳에는 예전의 나루터 자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입구에 나루터 기념비로 세워져 있다. 당 안에는 중앙에 서낭각시를 중심으로 왼쪽에 산신, 오른쪽에 용신이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산신은 독성과 닮아 있는데, 호랑이와 함께 그려져 있고, 용신은 용과 함께 그려져 있다. 서낭각시 그림은 수난을 받았다. 옛날의 그림이 없어져 다시 모신 것인데, 옛것과 같다고 한다. 서낭각시(당각시)의 성은 문()씨요, 이름은 순자라고 한다. 대상신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왜 그렇게 불렸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순자라는 신격(神格) 대상이 언제 어떤 전승물에 근거하여 정착되었는지는 아는 이가 없다. 이는 제보자 변진수가 그림이 없어져 서울에서 다시 그림을 그려 올 때 그곳 화상인 신씨가 전에도 그 그림을 자신이 그려 준 적이 있다며 서낭각시의 이름이 문순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서낭각시의 화상은 단아하고 위엄성이 있다. 남한강 유역의 신격이 여성성(女性性)을 보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둘째, 부흥당고사는 한강 유역의 부군당 당고사를 닮아 있다. 부흥당은 한강 유역에 분포된 민속신앙인 부군당과 같은 형태의 신앙으로 볼 수 있다. 부흥당 당고사에서는 무당들을 불러 동리를 돌며 안반(案盤)굿을 하고 제당에는 소를 잡아서 제물로 올렸다. 최근에는 약식으로 한다. 김현해 제보자는 이장집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시루도 장만한다고 하였다. 예전의 당굿은 정월 10일에 시행했는데, 정월 5일 경 당골무당이 광대와 악사를 데리고 와서 광대놀이를 하여 3일 간 돈을 벌고, 9일에는 아침부터 각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축원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얻어 당고사의 비용을 마련하고 밤에는 제관(祭官) 집에서 안반(案盤)굿을 하였다. 광대놀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전야제의 걸립굿’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날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당굿추위’라는 말도 생겼다고 할 정도로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예전에는 당고사가 며칠 동안 대규모로 거행되었는데, 수운(水運)이 쇠퇴하면서 경기가 침체되어 경비를 걷기가 어렵게 되자 40여 년 전에 회의를 열어 유교식으로 간략하게 제사하자고 의견을 모은 후에 일반 서낭제처럼 규모가 작아졌다. 예전에 10일 아침부터 부흥당에서 굿을 하기 시작하면 인근지역에서 구경꾼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대체로 원형적인 별신제는 일제강점기에 사라졌고, 해방 이후와 1977년 이후 4월 초파일에 재연되어 전승되다가 2004년 우륵문화제의 축제항목으로 자리잡았다.

서낭제는 정월 초하룻날 밤 6~7시 경 제사를 지내며 축관은 구장이 맡는다. 축문의 내용은 동네 불미스런 일이 없고 잘되기를 바라며, 치성 오는 사람이 아무 탈 없이 돌봐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라 한다. 서낭제는 목계 1구와 2구가 한해씩 번갈아 교대로 지낸다. 옛날에는 정월 초닷새날 당골무당이 광대와 악사를 데리고 와서 광대놀이를 하여 돈을 모은 뒤, 7일 제주집에서 안반굿을 하고, 10일 목계나루에 있는 부흥당에서 당굿을 거행하였다. 도당굿과 사율의 서낭굿이 혼합된 모습이다.

그러나 당굿으로 행하는 서낭제는 40여 년 전에 중단되고 지금은 서낭각시의 그림이 있는 부흥당에서 마을 제주가 제물을 차려 놓고 유교식 제사를 지낸 뒤 소지를 올리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때 굿거리가 조사된 것이 없다. 본래는 서낭당, 용왕제당, 산신격의 부흥당이 분리되어 진행되어 오다가 장시의 쇠퇴와 함께 중첩되어 전승되고 있다. 무형문화재 복원과 재구에서 이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제의 세부절차는 남한강 유역의 동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의 시기는 625전쟁 전에는 4월 초파일을 전후해서 날을 받아 매년 별신제를 지냈다. 10월 우륵문화제 때 약식의 별신제가 공연용으로 연출된 것이다. 우륵문화제의 목계별신굿도 이 곳 부흥당에 와서 신을 받아 갔다. 제수는 주 호두 쇠머리 돼지머리 등을 사용한다. 오늘날은 이미 사라졌지만, 운항의 안전을 기원하는 비정기적인 의례에서는 대개 삼색실과 및 북어 그리고 제주 정도를 진설하였다. 정월 9일을 기해 행하는 정기적인 의례에서는 소머리, 삼색실과(곶감, , 대추 등), 시루떡, 백설기, 수수팥떡, 통북어, 두부, 막걸리 등을 진설한다. 특히 수수팥떡은 약간 떼어 사방에 던짐으로써 주위의 부정을 물린다. 포는 시루의 양쪽에 꽃아두며, 떡시루 가운데는 정안수를 올려놓는다. 제주(祭酒)는 ‘조라술’이라고 하는데 7일 전에 누룩으로 술을 빋어 항아리를 서낭당에 묻어 놓으면 아무리 추워도 익기 마련이다. 제물준비는 대동계에서 일부 보조를 하고 나머지는 동네걸립을 통해서 추렴한다. 생기복덕에 맞는 노인이나 이장이 제주(祭主)를 맡는다.

금기는 엄격하여 초상난 집이나, 상가에 다녀온 사람, 출산한 집, 개고기 먹은 사람 등은 서낭당에 가지 못한다. 제의 사흘 전에 금줄을 치고 호아토를 세 군데 뿌려서 편다. 제의는 동네 이장과 마을 사람 몇몇이 올라가서 지낸다. 헌작(獻爵), 독축(讀祝), 대동소지 올리기, 개인소지 올리기의 순서로 하며 일반 서낭제를 지내는 방식과 대동소이하다. 축문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없고 해마다 새로 써서 읽는다. 이곳의 서낭신격은 영험하여 이 마을사람들이 강에서 탈이 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외지 사람들이 와서 안좋은 일을 당하거나 익사한다고 한다. 이는 제의에 대한 신이성과 신성성을 강조하는 지역민의 담론이기도 하다.

넷째, 별신제의 원형은 고정적이지 않다. 장시 별신제의 특징이기도 하다. 앞으로 원형 복원과 아울러 별신제의 전통축제화에 대한 방향은 정통성을 지키며 장시별신제의 성격을 계승되도록 해야 한다. 원형 복원의 문제와 아울러 목계포구민속을 연계하는 일이다. 우선 목계별신제를 체계젹으로 복원하되, 관련 민속 항목도 동시에 연계하여 재현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륵문화제의 항목으로 재현된 것과 민속예술축제의 출연용으로 재구된 것이 있다. 1970년에 무형문화재 지정 논의가 있었지만 그 이후 망각되어 복원에도 혼선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남한강 일대 강마을에서는 동제와 별도로 뱃고사를 지냈다. 살미면 목벌리 등지에서 주기적으로 지냈다고 한다. 뱃고사는 정월 초하루부터 열나흘까지 배를 이용하는 마을사람들로부터 돈을 모아서 지낸다. 돈을 모으는 방법은 배에다 한지를 펴고 상을 갖다 놓으면 배를 탄 사람들이 성의껏 돈을 놓는다. 떡은 두 시루를 해서 한 시루는 서낭으로 가져가 정성을 올린다. 집으로 돌아와 나머지 한 시루를 배로 가지고 가서 굿을 한다. 이 때 무당은 징을 작은 소리로 친다. 그리고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축원을 하고, 사공은 배에 절을 한다. 또 사공은 집에서 쌀을 가져와 세주먹을 강물에 던진 다음 한지에 쌀을 넣어서 배안에 흰 실로 묶어놓는다. 이처럼 뱃고사의 기원성은 목계별신제의 의례성에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목계별신제는 기원의례 중심의 무속형 대동제다. 장시 활성의 의례성을 통해 상업축제를 보인 점이다. 별신제의 주도 세력은 상권을 가진 상인층이었으나 점차 반농반상 지역민 누구나 참여가 확대되었다. 신격의 정체는 여성신이 중심이고 용신, 산신이 함께 좌정하였다. 목계별신제에 부수하여 기줄다리기와 남사당패놀음, 제머리마빡치기 등 각종 민속놀이가 연행되었다. 난장이 서 각종 볼거리가 많았고 각종 뒷풀이 놀이가 성행하였다.

. 목계별신제의 보존과 지정

1. 포구 장시축제의 성격을 창조할 것

목계별신제는 장시가 번성할 때 민속전승의 본래적 맥락에서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 무형문화재로서 가치는 남한강 유역의 교역 중심지가 만들어낸 자연발생적인 장시 관련 제의였다는 점이다. 제의성과 난장성이 어울린 공동체 제의였다. 신을 위한 제의성은 신성성을 지향하고 제의 밖의 놀이는 난장성을 지향한다. 난장성의 대표적인 것이 목계기줄다리기다. 기줄다리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부터 시작되어 2월 보름께 끝난다. 기줄다리기가 끝난 뒤 줄은 나루 모래사장에 그대로 두었다가 장마 때 줄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한 해 동안 마을이 평안한가를 점친다. 밤에 기줄다리기가 끝난 뒤 강변에서는 꼭두각시놀음인 ‘박첨지놀음’을 하였다. 이 밖에 난장에서 유명했던 음식으로 ‘행장떡’이 있는데 이는 찰떡에 흰 고물을 묻힌 것으로 해장국에 넣어 먹으면 맛이 별미였다고 한다. 이들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어울렸던 목계민속의 현장이었다.

목계별신제는 농경의의례적인 면과 시장의 번영을 위한 기원의례성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별신제와 연계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기줄다리기의 경합성과 대동성은 세시풍속의 주기적 의례뿐만 아니라 큰나루터라는 지역적 의미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도시축제의 원형으로 살피되 장시의 번성과 별신제의 활력이 비례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유명한 목계별신제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은 부정기 대동제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목계별신제 포구축제가 남한강 전통축제의 원형이다. 이 원형의 공동체유산에 대한 고증과 활용이 심도 있게 논의되어야 한다.

2. 중원문화권의 상징적 대동놀이를 드러낼 것

목계마을의 축제는 충주적이면서 중원문화권의 본질을 내재하고 있었으나 남한강의 기능이 변질에 따른 요소가 발견되어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중원문화권의 지역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승기반과 전통적 맥락을 복원하지 못한 것은 중원문화권의 문화적 접변의식도 한 몫을 하였다. 해석상의 한계와 문제는 지역주민의 구술적 증언담을 통해 상당 부분 극복하였다. 정도는 차이가 있으나 별신제의 가치는 마을문화의 공동체 요소를 가장 다양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계별신제에 대한 민속학의 검토는 남한강 옛 문화를 복원하는 의미 이상의 전통 문화재의 가치가 있음을 찾아내는데 있다. 남한강 마을문화의 정체성과 미래성을 부각시키는 지역학의 입론인 셈이다. 목계마을의 복원은 충주의 옛문화 재창출과 전통도시화 작업이 의미가 있다. 남한강의 옛문화 어디서 볼 수 있는가. 현재로서는 없다. 목계마을의 민속성과 관광성은 살려낼 때 남한강의 문화를 21세기에 살려내는 길이라고 보았다. 목계마을과 가흥창, 내창장을 연계시키는 방안도 필요하다.

충주시 엄정면의 옛 지명이면서 조선시대 남한강 뱃길을 이용한 물류교역의 중심지로 번창했던 내창장을 부활시켜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내창장 이벤트와 경로행사가 2004 11 13일 충주시 엄정면 미내리 시장마을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바 있다. 충주시 엄정 시장번영회와 엄정 재향군인회가 주관한 내창장민들에게 애향심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 행사는 먼저 내창장 유래비 건립사업 경과보고 및 제막식에 이어 길놀이 행사인 풍물단 공연이 펼쳐져 축제 분위기를 한층 북돋웠으며, 개회식과 함께 본격적인 이벤트와 경로잔치가 진행되어 흥겨운 주민 한마당 잔치가 되었다.

이번 행사는 엄정면 생활개선회가 갓무로 만든 목계마을 특유의 음식이 목계갓채 시식회를 열고, 탐방 국원도예는 관내 학교 및 어린이집을 대상으로 도자기 감상 및 체험장을 마련해 인기를 끌었다. 또 내동노인회는 짚풀공예 전시 및 시연을 했으며, 시장변영회 주관으로 무료음식 시사회도 열려 업소별로 특유의 진미 음식을 선보였으며, 품바 공연과 민요가수 공연, 기타 오락이 진행돼 내창장의 옛 정취를 살렸다. 영조 45년에 간행된《동국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내창장은 250여 년 전부터 장이 서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되며, 목계나루가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번성하였다. 내창장은 1950년대를 전후해 가장 성시를 이루었고 대목이나 백중 시기에는 1천명 이상의 장꾼이 모이기도 했다.

목계별신제의 재현은 남한강 강변 공동체 문화유산을 복원하는 일이다. 충주시의 장시민속마을로 전통문화유산을 보여주는 문화역사마을이 되는 셈이다. 목계별신제 보존회를 중심으로 목계별신제 복원과 포구축제 재구에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한 충주시의 정책적 지원과 목계지역민들의 의지가 요청된다.

목계별신제는 원형 위주로 재현하되 목계마을 주민들 중심으로 현재의 동제행사와 연계시킨다. 정월 대보름 전후에 목계별신제 행사를 진행한다. 목계별신제의 충청북도 문화재 종목으로 차별화를 부각시켜 지정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원형 복원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예전처럼 할 수는 없어도 주요 의례의 원형은 유지해야 한다.

목계별신제와 연계하여 기줄다리기의 전승기반을 갖추어야 한다. 줄다리기 행사로 정월 대보름에 하되 인근 지역까지 참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충주시 차원에서 협조가 필요하다. 아동들과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하는 줄다리기 행사가 시행되어야 한다. 줄다리기의 대동적 축제화가 필요하고 평소 관광객들도 찾아와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예전의 시장 관련 민속놀이로 공연하게 하되, 장시 목계장터를 구축해야 한다. 옛시장은 복원하고 상설판매 장터로 꾸민다. 뗏목과 황포돛배 또는 소금배도 재현해야 한다. 상징적 배를 만들어 목계 앞강에 띄울 필요가 있다. 공연용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목계별신제의 축제화를 위해 갓채음식, 목계돼지국밥, 목계행장떡, 남한강 민물회 등 민속음식 복원을 통해 목계별신제 잔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갓채와 떡해장국은 충주의 향토음식으로 선보여야 한다. 지역농수산물의 판매 그리고 홍보 체계와 연계해야 한다. 전통적인 놀이 중 재미있는 항목을 도입하여 관광객들에게 재미를 주어야 한다.

신경림 시 <목계장터> 등을 이용한 거리문화예술제도 주기적으로 개최한다. 충주시 문화테마코스에 반드시 목계마을을 포함시켜 남하강과 충주시의 역사를 함께 알릴 필요가 있다. 충주 옛문화 소개에 목계가 빠진다면 ‘물’의 민속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충주시 명품도시화 이미지로 목계를 연결할 필요가 있다.

학교나 수납장 등을 이용하여 상설 전시관을 만든다. 이름도 지역민의 뜻을 모아 짓고 내용도 남한강 생활문화를 중심으로 하되 과거 무형문화재를 수집하여 누구나 와서 체험할 수 있는 민속현장이 되도록 한다. 충주박물관의 민속모형을 구체화하고 사이버전시 콘텐츠도 구축하여 과거를 보여주며 따뜻한 오래된 미래임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목계별신제는 원형용과 예술공연용으로 이원화(二元化)가 필요하다. 목계민속의 문화콘텐츠 사업이 전개되어야 한다. 목계민속의 쓰임새는 원형 자체를 바탕으로 지역문화의 향부론 시각에서 문화자원화해야 한다. 과거의 자료를 토대로 누구나 관심을 갖는 문화상품을 개발하되 감동적인 품목으로 생산해야 한다. 목계민속의 복원과 활용은 지역문화의 활성화에 한 몫을 할 것이다. 지역주민들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삶의 질 또한 이를 계기로 개선되어야 한다. 목계의 미래, 남한강의 또 다른 약속의 서사다. 목계별신제의 역동성은 보존과 재현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줄다리기의 함성만큼 전통의 내재된 가치가 충주의 미래에 활력소로 작용되어야 한다.

3. 목계별신제는 목계별신제보존회를 중심으로 하되 목계마을 사람들 전체의 전승의식이 있어야 할 것

서울 남이장군사당제나 경남 가야진 용신제도 단절된 것을 복원책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계별신제의 사정도 이보다 못하지 않다. 충청북도 문화재 지정을 위해 마을 주민 중심의 별신제보존회를 잘 관리해야 한다. 줄다리기와 연계하여 지정할 필요가 있다. 별신제 시기, 참여자, 신격, 공간 활용 등을 재검토해야 한다. 뒤풀이 형태로 줄다리기와 제머리마빡이, 농악 시연은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제머리마빡이는 목계별신제의 난장과 관련된 놀이 종목이 새롭게 발굴된 점도 주목해야 한다.

켜켜이 쌓여 있는 목계민속 안에서 목계별신제의 정통성을 딱 이것이라고 확정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목계 장시 이미지로 내세우는 지역차원의 문화전략을 통해 지역민들의 옛 것 인식과 지금 여기의 생존대응방식으로 삼아야 한다. 무엇보다 전승주체들의 적극적인 활동과 원형 전승의 재구를 위한 자부심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문화역사마을의 공연물을 위한 현대적 재창조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실험과 콘텐츠창작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지정을 위해 충실한 원형 고증의 대본과 전승자 구성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학문적 사료 축적이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목계별신제의 전통을 논의하는 일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러나 최근 충주문화원과 목계별신제보존회의 노력과 같이 자체적인 전승주체들을 다시 세웠다. 지정을 위한 보존책에 목숨을 걸되, 지역문화의 축제 자원화 같은 미래 덕목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생동감 있는 이미지 환유와 열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죽은 문화가 아닌 충주문화의 역동성과 그 지향성을 확인해나가는 살아있는 장시문화로 유도해나갈 당위성이 분명히 있다.

4. 목계별신제 무형문화재 지정 조건

무형문화재라는 제도의 등장이 전통문화가 약화되어가는 상황과 관련 있으므로 전승 현실과 불일치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제도 자체가 전통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육성책이 아니라 아주 소극적인 보호책과 통제 책에 불과한 것이라는 판단에 비추어 본다면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런 이유 때문에 무형문화재와 민속 전승의 본래적 맥락과의 거리를 점검하고 진단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무형문화재가 민속문화의 본래적 맥락을 얼마만큼, 어떻게, 제대로 승계하고 있는지, 현재적 양상은 어떠한지, 민속 전승의 일반적 양상과 어떤 간격을 보이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무형문화재의 지정 목적을 극대화하고 새롭게 재창조해갈 수 있는 방향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목계별신제가 연행민속의 공연물 형태로 전락한 것은 문제점이다. 더구나 목계별신제의 지역축제화로 복원보다 축제 항목화란 것도 지정 평가에 한계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의 방식이 바뀐 상황에서 원래의 모습 -그 기준의 잣대도 모호함-을 강조하여 지정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없다. 본래의 맥락을 살리되 전승 가능성을 살려내자는 것이다. ① 남한강 교류민속의 적층적 특색을 지닌 제의, ② 중원문화권의 전통적인 대동제, ③ 장시 관련 공동체 신앙 연구 자료로 귀중함, ④ 현재 지정하지 않으면 문화적 가치가 소멸되어 박제화됨, ⑤ 별신제 관련 장터민속의 예술적 가치가 있음 등이다. 은산별신제(국가문화재 9)와 제천 오티별신제(지방문화재 8)처럼 전승기반이 튼실하지는 않으나, 지역문화의 정체성 차원에서 전승기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정이 추진되어 관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정책적 실천이 필요하고 이번 학술회의에서 의견이 충분히 개진되어 지역민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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